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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미치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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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미치히로는 1696년 쓰시마 후추번의 3대 번주 소 요시자네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히구치 미치히로로 불리다가, 1731년 형인 6대 번주 소 요시노부의 양자가 되어 7대 번주가 되었으나, 소 요시노부의 적자인 소 요시유키가 성장할 때까지 임시로 번주직을 수행했다. 1732년 소 요시유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759년 사망했다. 그는 쓰시마 번주 재임 기간 동안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승습을 통보하고,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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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미치히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소 미치히로(宗方熈)
가몬So clan mon.svg
생애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출생겐로쿠(元禄) 9년 9월 27일(1696년 10월 22일)
사망호레키(宝暦) 9년 11월 29일(1760년 1월 16일)
묘소일본 나가사키현(長崎県) 쓰시마시(対馬市) 고쿠분(国分)의 반쇼인(万松院)
계명청정원전양지심수대거사(清浄院殿涼地心水大居士)
아명주쿠슈(竹寿)
개명히구치 미치히로(樋口方熈), 소 미치히로(宗方熈)
별칭슈바(主馬)
관직
관위종4위하(従四位下), 시종(侍従), 쓰시마노카미(対馬守), 민부대보(民部大輔)
쓰시마후추 번(府中蕃) 번주
번주 재임 기간1731년 ~ 1732년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요시무네
가문
씨족소 씨(宗氏), 히구치 씨(樋口氏), 소 씨
아버지소 요시자네(宗義真)
어머니쇼시 간자에몬(庄司勘左衛門)의 딸, 지안인(慈眼院)
양아버지소 요시노부(宗義誠)
형제요시토모(義倫), 후루카와 사네코토(古川真言), 요시미치(義方), 다다 도모요시(多田倫寛), 요시노부, 미치히로, 다카세 유키미치(高瀬行方)
배우자정실: 히구치 사네쓰라(樋口真連)의 딸, 호쇼인(普照院)
측실: 고가 구로자에몬(古賀九郎左衛門)의 딸
자녀히구치 유키쓰라(樋口如連, 장남), 다카세 시게쓰네(高瀬蕃常, 차남), 요소(与曽, 난바 무네시로難波宗城의 아내), 양자: 요시유키(義如)

2. 생애

겐로쿠 9년(1696년) 9월 27일, 3대 번주 소 요시자네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신하 히구치 사네쓰라(樋口真連)의 사위가 되어 '''히구치 미치히로'''('''樋口方熈''', 히구치 슈바主馬)라 칭하였는데, 교호 15년(1730년) 11월에 형인 6대 번주 요시노부가 사망하고 그의 양자가 되어 교호 16년(1731년) 2월 21일 가독을 상속하였다(이때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4월에는 종4위하 시종(侍従) ・ 쓰시마노카미(対馬守)로 서위 임명되었다.

그러나 미치히로는 요시노부의 적남(嫡男)인 요시유키가 성장할 때까지의 징검다리적인 존재였기에 교호 16년(1732년) 요시유키가 17세가 된 것을 계기로 9월 11일 가독을 요시유키에게 넘겨주고 은거하였다. 이때에 관직이 민부대보(民部大輔)로 옮겨졌다.

호레키 9년(1759년) 11월 29일에 쓰시마 후추(府中)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4세. 히구치 가문은 요시유키로부터 이름자를 받은 그의 장남 유키쓰라(如連)가 이었다.

2. 1. 가독 상속과 은거

소 미치히로는 1696년 9월 27일 3대 번주 소 요시자네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신하 히구치 사네쓰라의 사위가 되어 히구치 미치히로(히구치 슈바主馬)로 불렸다. 1730년 11월 형인 6대 번주 소 요시노부가 사망하자 그의 양자가 되어, 1731년 2월 21일 쓰시마 후추번 7대 번주가 되었다. 4월에는 종4위하 시종, 쓰시마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미치히로는 소 요시노부의 아들 소 요시유키가 성장할 때까지 임시로 번주직을 수행한 것이었다. 1732년 소 요시유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며, 이때 민부대보로 관직이 변경되었다.

1759년 11월 29일 쓰시마 후추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4세. 히구치 가문은 소 요시유키로부터 이름자를 받은 그의 장남 유키쓰라가 이었다.

2. 2. 가계

소 요시자네의 아홉 번째 아들로 겐로쿠(元禄) 9년(1696년) 9월 27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 요시자네, 어머니는 지안인(慈安院)으로 쇼지 간자에몬(庄司勘左衛門)의 딸이다. 처음에는 신하 히구치 사네쓰라(樋口真連)의 서양자(婿養子)가 되어 '''히구치 미치히로'''(樋口方熈)라 칭하였다. 교호(享保) 15년(1730년) 11월에 형인 6대 번주 소 요시노부가 사망하자 그의 양자가 되어, 소 요시노부(1692-1730)를 양아버지로 두게 되었다. 정실은 호주인(宝珠院)으로 히구치 마사쓰라(樋口真連)의 딸이며, 측실은 고가 구로자에몬(古賀九郎左衛門)의 딸이다. 양자인 소 요시유키소 요시노부의 적자이다.

3. 조선과의 외교

1730년 소 미치히로가 쓰시마 도주가 되자 조선에 사절(차왜)을 파견하여 승습을 통보했다.[1] 파견된 차왜는 정관 삼촌중(杉村仲) 평성일(平誠一)이며, 도선주는 송본원좌위문(松本源左衛門) 도 가네오(藤兼雄), 봉진 선반우위문(扇半右衛門)으로 영조 6년(1730년) 4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 왜관에 체류하였다.[1] 이들이 가져온 소 미치히로가 조선 예조참의에게 보낸 서계와 그에 대한 답서는 한국의 《동문휘고》(同文彙考) 부편(附編) 권6 고부(告訃)에 기록되어 있다.[1]

소 미치히로가 요시유키가 장성할 때까지의 징검다리 역할이라는 것은 조선 조정에도 알려져 있었다.[1] 《증정교린지》에는 미치유키가 쓰시마 도주에서 물러나고 2년 뒤인 1734년에 쓰시마 도주 취임 당시 조선으로부터 받았던 도서(圖書)를 반납하였다고 적고 있다.[1] 미치유키가 물러나고 요시유키가 쓰시마 도주가 되었을 때 조선 조정은 1733년 당상 김현문(金顯門)과 당하 박춘서(朴春瑞)를 비롯한 문위행 사절단을 쓰시마로 보냈다.[1] 1760년에 소 미치히로가 죽자 쓰시마에서는 다시금 조선에 차왜(사자)를 보내 미치유키의 유물과 유서를 조선 조정에 바쳤는데, 조선 조정은 그가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근 30년이 되어 규정에 어긋난다며 받지 않았다.[1] 그러나 쓰시마측 차왜는 끝까지 돌아가지 않고 버텼고, 결국 1766년에 이르러 훈도 최학령(崔鶴齡)의 중개로 유서와 유물은 물리치고 단지 서계와 별폭만을 받고 다례, 연향은 행하지 않았다.[1]

3. 1. 승습 통보와 조선의 반응

1730년 소 미치히로가 쓰시마 도주가 되자 조선에 사절(차왜)을 파견하여 승습을 통보했다.[1] 파견된 차왜는 정관 삼촌중(杉村仲) 평성일(平誠一)이며, 도선주는 송본원좌위문(松本源左衛門) 도 가네오(藤兼雄), 봉진 선반우위문(扇半右衛門)으로 영조 6년(1730년) 4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 왜관에 체류하였다.[1] 이들이 가져온 소 미치히로가 조선 예조참의에게 보낸 서계와 그에 대한 답서는 한국의 《동문휘고》(同文彙考) 부편(附編) 권6 고부(告訃)에 기록되어 있다.[1]

소 미치히로가 요시유키가 장성할 때까지의 징검다리 역할이라는 것은 조선 조정에도 알려져 있었다.[1] 《증정교린지》에는 미치유키가 쓰시마 도주에서 물러나고 2년 뒤인 1734년에 쓰시마 도주 취임 당시 조선으로부터 받았던 도서(圖書)를 반납하였다고 적고 있다.[1] 미치유키가 물러나고 요시유키가 쓰시마 도주가 되었을 때 조선 조정은 1733년 당상 김현문(金顯門)과 당하 박춘서(朴春瑞)를 비롯한 문위행 사절단을 쓰시마로 보냈다.[1] 1760년에 소 미치히로가 죽자 쓰시마에서는 다시금 조선에 차왜(사자)를 보내 미치유키의 유물과 유서를 조선 조정에 바쳤는데, 조선 조정은 그가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근 30년이 되어 규정에 어긋난다며 받지 않았다.[1] 그러나 쓰시마측 차왜는 끝까지 돌아가지 않고 버텼고, 결국 1766년에 이르러 훈도 최학령(崔鶴齡)의 중개로 유서와 유물은 물리치고 단지 서계와 별폭만을 받고 다례, 연향은 행하지 않았다.[1]

3. 2. 도서 반납과 문위행

소 미치히로는 임시 번주였기 때문에 1734년에 조선으로부터 받았던 도서를 반납했다.[1] 소 요시유키가 쓰시마 도주가 되었을 때, 조선은 1733년 김현문, 박춘서 등을 문위행 사절단으로 파견했다.[1] 이는 조선 조정이 소 미치히로의 지위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 1760년 소 미치히로가 사망하자, 쓰시마는 조선에 차왜를 보내 유물과 유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조선은 규정에 어긋난다며 거부했다.[1] 쓰시마 측 차왜의 계속된 요청에, 결국 1766년 훈도 최학령의 중개로 서계와 별폭만 받고 다례와 연향은 생략했다.[1]

3. 3. 사망 통보와 조선의 대응

1760년 소 미치히로가 사망하자 쓰시마는 다시 조선에 차왜(사자)를 보내 미치히로의 유물과 유서를 전달하려 했다.[1] 그러나 조선 조정은 미치히로가 은거한 지 30년이나 되어 규정에 어긋난다며 받지 않았다. 쓰시마 측 차왜는 돌아가지 않고 버텼고, 결국 1766년 훈도 최학령(崔鶴齡)의 중개로 유서와 유물은 돌려보내고 서계와 별폭만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으며, 다례와 연향은 행하지 않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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